올해 4월부터 제 옷깃에는 동백꽃 배지가 달려 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된 제주4·3 7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배지입니다. 배지를 달아주던 제주도 분이 제게 말했습니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슬픈 역사를 가진 섬입니다. 함께 기억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이정모│서울시립과학관장

정말이더군요. 제주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고 살기 위해 제주를 탈출해야 했습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자료에 따르면 1948년과 1949년 두 해 동안에만 1만 8000여 명의 제주민이 일본에 밀입국했습니다. 처참한 학살의 현장으로 변한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로 가서 난민이 된 것이지요. 일본은 이들을 받아주었고 난민들은 나중에 제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아픈 역사는 제주라는 섬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전체로 확장되었지요. 3년 동안이나 계속된 6·25전쟁 동안 수없이 많은 난민이 생겼습니다. 아니, 전체 국민이 난민 상태가 되었습니다. 국제사회는 우리의 어려움에 눈감지 않았습니다. 유엔은 한국재건단(UNKRA)을 구성해서 6·25전쟁에서 발생한 난민을 도왔습니다. 유엔 한국재건단은 의료, 식량,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고 그 덕에 우리는 빠른 재건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지요. 유엔 한국재건단은 한국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난민기구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유엔난민기구 발생의 근원지가 바로 한국 땅인 것이지요.

난민기구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난민들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오늘날에도 세계 인구의 1퍼센트인 7700만 명이 내전으로 난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절반이 아이들이지요.

예멘이라는 나라를 아십니까? 저는 예멘이 중동 어딘가에 있는 나라인 것까지는 알지만 정확히 어딘지 지도에 표시할 자신은 없습니다. 제 주변에는 예멘에 다녀온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요. 예멘에서 5년째 내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잊힌 전쟁’이지요. 예멘에서는 벌써 1만 명 이상이 숨졌습니다. 지금도 매일 여성들과 아이들이 기아와 전쟁으로 죽고 있습니다. 예멘의 남자들은 징집을 당해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조국을 떠나 난민이 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가운데 549명이 멀고 먼 제주도에 왔습니다. 이들은 예멘을 떠날 때만 해도 제주도에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이 어딘지도 잘 몰랐고 아마 제주도란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겠지요. 제주도민들에게도 예멘은 낯선 나라입니다. 이들은 생김새와 언어도 다르고 먹는 것과 풍습이 다르죠. 특히 이슬람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종교를 믿습니다. 아마 다른 곳이었다면 이들을 쉽게 배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주도민들은 달랐습니다.

<장소, 사람, 환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타인에게 있을 곳을 내어주는 환대의 의미를 촘촘하게 생각하게 하는 책이지요. 제주는 이 책 제목에 딱 맞는 곳입니다. 제주도민들은 난민에게 자기 집과 호텔방을 내어주고 통역과 건강진료를 해주고 일자리를 알선해주고 있습니다.

난민을 향한 제주도민의 열린 마음은 북한과의 공존과 화합을 앞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난민을 향한 제주도민의 환대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세계인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길일 것입니다. 오늘따라 동백꽃 배지가 더 붉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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